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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가장 왜곡 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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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가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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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건 고구려 연나라 전투임

 

 여기서 정리하고 싶은 내용은 3가지임.

1. 전연의 계획은 망가졌고 생각보다 모용황이 쫄리는 위치였음.

2. 고구려의 피해는 크지만 멸망 직전까지 크지도 않음

3. 전연의 활약은 고구려 주력을 피해서 얻은 승리이기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음. 

4. 나무위키 등에서 고국원왕 치세를 잃어버린 시기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발전하는 시기였음



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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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염이 삼국시대를 종결하였지만 후계를 사마충으로 하여 팔왕지란이 터지고 그 혼란을 틈 타 영가지란이 터졌음. 영가지란이 터지면서 중원은 혼란에 빠졌고 덕분에 요서 지역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 


당시 요서에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었는데, 후진 요서의 농경으로는 이를 버티지 못하였기에 중원 침공은 필연이었으며 고구려도 반드시 잡아야 했음.


 후방에 있던 고구려가 너무 거슬려서 전연의 인물이었던 모용한이 계책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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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쉬운 상대인 우문부랑 달리 고구려는 늘 틈을 엿 보고 있어서 중원 진출에 앞서 반드시 밟아야함

2. 고구려가 북도에 올인할테니 남도로 따면 됨.

3. 북도군이 못 이겨도 수도 따이면 고구려의 저항은 없을 것

4. 부여까지 따야함


 이게 모용한, 모용황이 고연전 때 내세운 전투 전략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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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전연의 예상처럼 고구려는 움직이지 않았음.

1. 모용황의 역배는 성공했지만 대신 북도에서 전멸하여 고구려 주력은 건재하였음.

2. 저항 없다는 모용한 뇌피셜과 달리 고국원왕은 아예 무반응으로 나와서 결국 전연은 눈 앞에 둔 승리를 포기함. 

3. 결국 모용황 측에서 고구려를 회유하고 대신 선왕의 시신과 왕모를 인질 삼아 고구려를 구속하겠다고 걸로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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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모용외 모용황 시기 전연 국력이 좀 왜곡됐는데 당시 북중국은 후조가 꽉 잡고 있어서 진짜 ㄹㅇ 지도 보면 그렇게 안 크다. 물론 이건 고구려도 마찬가지지만. 


 영가지란 인구 유입 버프는 후진 농경에서 디버프로도 작용하지만 모용황은 걸출해서 잘 다스렸고 고구려보다 체급은 당연 커서 모용외 때랑 달리 개박살내긴 함. 이것도 고구려 주력 피해서 이뤄낸 성과지. 생각해보면 주력을 대파해서 얻어낸 성과는 아님 <=이게 가장 간과되는 사실임. 

 

 전연의 전략적 목표는 부여까지 였고 고국원왕 대 부여 진출 및 사수까지는 사실임. 

이후 46년 전투에 재침하여 부여한테 큰 타격을 입힘. 

 일단 이 전투는 고구려가 대패해서 붕괴된 것은 아님. 오히려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는 고구려보다는 부여에 가깝다고 보면 될 듯함. 


 이전부터 339년 신성도 공격하지만 크게 재미 못보고 오히려 고구려 군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평곽에 모용각 주둔. 


 뭐 이런 요소 때문에 소위 수도 털렸다, 모후 끌려갔다 등등에 묻히지만 이것도 엄밀히 따지면 격퇴한 전투이긴 함. 

하지만 봉유 상소에서 고구려 뒤졌다라는 식으로 표현되는 거 보면 엄청난 타격은 맞음. 

근데 멸망 직전이고 잃어버린 시기이다? 이건 솔직히 회의적. 


2. 기막힌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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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호 사후에 후조가 빠르게 붕괴하면서 전연은 352년 후조를 멸하고 화북을 차지함.

석호의 죽음이 349년이기에 영가지란 때 인구 이용해 잡아먹은 거.


 영가지란으로 전연 체급차가 커졌다는 거 생각해보면 고국원왕이 졸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주력군 건재하게 유지하고 부여 사수하는 등 생각보다 잘 싸운 전투였음. 이후 고구려는 대규모 축성 작업 펼치고 왕권을 강화해 태왕호를 사용하고 정변도 고국원왕 이후부터 멈춘다.


 만약 전연한테 멸망 직전까지 연거푸 패했다면 고국원왕 시기 왕권이 강해진 게 설명이 안 됨.


 내가 이전 글에서 전연은 억까 있다고 표현했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님. 판도가 전연한테 ㅈㄴ 좋아서 뒤통수 못 치고 빌빌 거린 건 역사적 사실. 또 인구 유입 포텐 슬슬 터지면서 미천왕 대와 달리 고국원왕은 전연한테 공세로 나서기가 힘들었음. 고국원왕 대 전쟁 흐름을 보면 고구려가 수세적인 부분이 돋보이는데 이를 단순히 고국원왕의 무능으로 치부하기는 힘듦. 미천왕이어도 인구 유입은 어떻게 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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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런 기회가 오자 전연의 계획은 바뀜.

1. 남방으로 계속 진출해야 하기 때문에 고구려라는 배후 위협을 덜 필요가 있다.

2. 355년 책봉하여 고구려 왕으로 정식 인정


 조공 책봉은 1회성 외교 관계에 불과했으나 이 시기 전연의 영향으로 불교 및 율령 깔아놓는 판도를 만든 게 아닌가라는 설도 존재함(나머지는 전진과 동진 설)

중요한 건 이 책봉 이후 고구려는 전연의 군사적 위협에 벗어날 수 있었고 양국은 전연의 멸망까지 군사적 충돌을 보이지 않음.


 고국원왕 역시도 후조 자폭으로, 전연의 중원 진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뒤치기를 시도하지 않았고 전연 역시도 고구려 주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때리기 보다는 그냥 책봉하기도 하고 모후나 시신도 다시 돌려줌.


3. 고국원왕 시기 왕권강화


 사실 대규모 축성 작업이나 태왕호 등등은 이미 여러 번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줄이겠음..

고국원왕 시기는 빛나는 고구려 중기의 시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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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정변을 보면 고구려 전기에서 11번 터졌고 고국원왕 이후 고구려 중기로 들어가면서 횟수는 감소함.

고구려 후기가 귀족연립정권으로 분류되는데, 이 시기부터 반란이 일어남. 후기는 왕실세력보다 귀족의 힘이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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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커버하기 힘든 백제전이 있음. 치양 전투를 보면 고국원왕은 지방민까지 끌어들여 2만 군대를 모았지만 의병이라 적기가 뚫리자 그대로 붕괴했음. 반대로 백제는 빠르면 근초고 때 반공민을 공민으로 편입하고 설에 따라 율령 반포를 근초고왕 때 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 치양 때 백제한테 항복한 고구려 군의 숫자는 5000명인데 이는 1/4에 해당함.

아무리 패했다고 해도 항복한 숫자가 지나치게 많은데 아직까지 복속민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어서 그렇다고 파악하고 있음.


 반대로 백제는 평양을 함락하지 못해도 군이 와해되지 않았고 이는 근구수 시기도 마찬가지임.

다만 고국원왕의 죽음이 위기감이 되어서 단합되었다고 보는 측도 있음.


 고국원왕 시기는 과도기였으며 오히려 발전하는 시기였지. 

잃어버린 시기가 아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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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전투도 고국원왕 개인의 군재, 그니깐 단순 전술상의 문제보다는 다른 시점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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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연전 북도의 승리는 왕제 고무의 활약이었음. 그렇다고 고국원왕이 저평가 받을 이유는 없음. 

왜냐면 사진 인물은 영양왕인데 영양왕도 본인이 직접 살수대첩 일으킨 것도 아님에도 명군으로 추앙 받는 것처럼 그냥 사람을 잘 썼다고 봐야함. 물론 이러한 점 때문에 을지문덕이 인지도는 더 높긴 하지만 영양왕도 명군인 건 분명 사실임.


 일단은 고연전도, 위에 언급한 전문가 피셜에 따르면 고구려가 막아낸 게 맞고 그 다음 상황이 전연한테 너무 좋게 전개되어서 고구려 측에서 뭘 할 수가 없었음. 


 뭐 남북조로 따지면 유유도 관중은 왕진악, 심전자가 먹고 강릉은 유의, 익주 주령석, 경구 하무기가 먹었음에도 유유 공적으로 카운트 됨. 개인적인 업적은 남연 정벌이 최고 업적이지만 그래도 용인이나 개인 무력으로 봤을 때 유유도 위대한 장군이 맞음. 유유가 생각보다 친정이 적다고 해도 그 업적이 부정되는 건 힘들지.


 고무 배치한 것도 결국 고국원왕이고 부여 사수도 고국원왕 용인술로 파악해도 될 듯함. 

 

4. 자세한 고구려 정치 내용은


 4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고국원왕의 생애

 고구려통사 3 고구려 중기의 정치와 사회(무료로 볼 수 있음)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고대 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
 백제와 요서지역(전연 인구 유입은 최진열 교수 발표 파트 참고)

 이런 서적들을 좀 참고하면 좀 다른 시각에서 고국원왕과 고구려 사회를 엿 볼 수 있음.

 그리고 내가 고국원왕 글을 여러 번 적고 꽤 긍정적으로 평해서, 나를 심각한 고국원왕 빠돌이로 착각할 수도 있음. 근데 내가 주로 긍정적으로 보는 영역은 내정이지. 외정은 아님. 그리고 고연전의 여파 때문에 소수림왕이 멸망 직전인 나라를 재부흥 시킨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고연전은 40년대이며 고국원왕은 70년대에 죽음. 시간차가 꽤 있고 위에서 본 것처럼 부여 사수하고 전연도 이후로 대규모로 공격하기보다는 중원 따겠다고 유화책으로 전환함.


 다른 건 몰라도 고연전에서 고구려 ㅈ망했다는 솔직히 많이 과장됐고 중원 진출 준비하려던 모용황 입장에서도 오래 끌수록 불리했기에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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